'그것'과 나

 커피 열매를 처음으로 맛본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에티오피아의 한 목동이라 한다. 그러나 원두에서 커피를 추출하는 공정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은 이탈리아인들이다.  ─  커피에 대해, 어디선가 본 문장들 짜깁기.

 '카페띠에라'는 아직 어색하고 '모카 포트'는 너무 건조해서 둘 중 뭘로도 불러 주기 싫은 '그것'. 아버지께서 큰 기대 걸고 구입하신 그것이 목요일 저녁 우리 집에 도착했다. 사실 내 삶에 도착한 지는 꽤 됐다. 한 번 볶은 씨앗에서 다시 싹이 나지 않듯이, 한 번 불에 구운 토기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한 번 탁월함을 경험한 영혼 안에는 저절로 '위계'라는 것이 생겨난다.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 더 나은 것과 그보다 덜 나은 것. 원하는 것을 곁에 잡아두려는 어리석은 집착과 섬세한 미각이 가끔 매력적인 요물 같은 도구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포장을 뜯고, 물에 잠시 담가 뒀다가 공업용 기름, 쇳가루 등을 울궈내기 위해 동봉된 세척용 커피로 세 번을 추출해 봤다.
원래부터 조작이 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 보니 자신감도 더 붙고, 기대감이 더 증폭되는 기분이었다.
똑같은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부녀가 그 과정 내내 찰싹 달라붙어 '그것'만을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런 경험도 오랜만이다. 공통의 관심사였던 어떤 장난감을 놓고 우리 둘이 정신없이 몰입된 광경 말이다.

 볶아서 포장한 지 4년이 넘은 세척용 커피에서 진한 크레마(crema)가 우러나올 때, 이 요물의 마력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밥 하는 압력솥과는 다르게, 원액이 필터를 타고 뿜어져 올라올 때의 '칙칙'거리는 소음과 뜨거운 김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아버지 말씀대로 "이래서 아날로그가 좋은 것"이다.

 사용 이틀째인 어제 오전에 찍은 사진. 처음으로, 추출 직후 '그것'에 남아 있던 크레마를 잔까지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크레마가 자동기기로 추출한 것에 비하면 다소 성기지만, 이나마도 예전의 '그것'들은 도달할 수 없었던 경지라고 한다. 
맛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제 '그것'은 나와 함께 늙어가는 물건이 될 것이다.

by 아니마 | 2008/07/21 00:23 | 囚人日記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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